작곡가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피아니스트로서 높은 자리에 우뚝 선 이래로 일상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실 하루하루 나날이 쌓여 가는 아주 미세한 신성에 감질나기 시작할 때쯔음에 부러 더 활발한 활동을 보인 것도 이유긴 했지만.
여하튼 위하트잇은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만들고자 스스로의 가치를 더욱 더 높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빛 아래에 나온 이후로 고아원 등에 다른 곳보다 더 자주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갓 사랑이 주는 따스함을 아이들의 맹목적인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 찬란하고 깊었으며, 매달리는 정도가 달랐다. 그녀의 손짓 한번에, 다정함을 녹여낸 말 한 마디에 아이들은 가을 하늘 아래의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녀는 문득 아이들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어른들은 봄바람에 살랑이는 풀잎과 같은 마음을 가졌지만, 아이들은 꼿꼿한 대나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한결같은 마음을 맹목적으로 그녀에게 바치면서 그녀의 신성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녀가 더 찬란히 빛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그 달콤함에서- 그녀의 마음속에 살랑이는 씨앗이 하나 들어찼다.
그것은 그녀의 영혼 속에서 더없는 박탈감과 슬픔, 대리만족 등의 모든 것을 꺼내왔다.
모리안에 의해서 가질 수 있음에도 뺏겼던 것들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본디 인간으로서 살아가던 위하트잇이, 가질 수 있었던. ‘혈연’과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감정까지.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밀레시안으로서의 삶을 강요당했다. 그중에서 그녀가 갈망했었던 원초적인 본능 중 하나인, 모성애란 것이-. 살랑살랑, 씨앗에서 싹을 틔웠다.
그녀는 어린 아이들을 통해서 모성애를 충족하면서 한 차례, 성숙을 경험했다.
밀레시안으로 살면서 여러 가지 갈려났던 감정들이, 단 하나의 복수를 위해 다 녹여냈던 감정들이 전부 그녀에게 살랑이며 자랐다. 부러 죽였던 감정이 조금, 아주 조금 살아나서 그녀를 흔들었다. 다시 한 번 신도들을, 사랑한다는 감정을 느꼈다. 한 때, 에린에서 그녀를 지지해주었던 이들의 손을 매정히 버리고 그네들의 목숨을 가볍게 취할 정도로 신도들에게 차가웠던 그녀가 봄날의 여린 싹에게 손길을 나눠주는 햇살처럼 따스해졌다.
풍부해진 감정은 그녀의 손에, 재능에 녹아내렸다. 그녀가 변함으로 인해서 신성은 더욱 찬란한 빛으로 타올랐다. 더없이 사랑스럽게, 아름답게.
*
셀러브리티로 올라선 이후의 나날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에게 너무 자주 모습을 보일수록 신비로운 이미지는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기에 초기의 위하트잇은 많은 이유를 내세우며 모습을 숨겼다. 하지만 부러 달달이 맞춰서 내던 앨범의 핑계도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는 시기가 오고야 말았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공식석상에 발을 디뎌야 했더라.
가진 자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포장하기 위해, 가진 것을 자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파티는 다양한 감정이 몰리는 곳이었다. 몰려드는 사람들의 눈초리는 선망과 시기, 질투가 뒤죽박죽 섞여 있었지만 부정적인 감정도 결국엔 관심이요, 어긋난 사랑이요. 어찌 되었든 간에 신으로서 자라나는 위하트잇에게 있어서 지금의 시점에선 그녀에게 향하는 감정, 그 자체가 신성의 양분이었다. 어긋남에도 온전하다는 모순적인 현상이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물론 후엔 지금의 부정적인 감정은 그녀의 신성에 해를 끼칠 수 있으니 적당히 완급을 조절해가며 흐트러뜨려야 마땅할 것이었지만, 지금은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손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없기도 했거니와 막상 그리 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것 같아 린!”
“아아, 이번에 순회공연을 기획중이라서. 아마도 유럽 쪽으로 나가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벌써부터 네 팬들이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어쩌겠어, 기회는 공평해야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어쩔 수가 없다네!
부끄러운 듯, 기쁜 듯 소리 높여 꺄르륵 웃는 소리를 흘리면서. 위하트잇은 슬쩍 그녀의 앞으로 밀려 나온 잔을 들어 올리고 흔들었다.
진한 색으로 물들어 흔들리는 그 액체들의 집합은 풍부한 달콤한 향에 어울리듯 화려한 색이었다. 그 틈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미세한 알콜의 향까지. 가볍게 휜 눈웃음 사이로 피어오르는 경멸을 애써 누르면서. 그녀는 우아한 놀림으로 입술에 잔을 부딪쳤다. 틈 사이를 비집고 흘러든 달콤함은 순식간에 그녀를 사로잡았지만 결코 그녀의 안을 휘젓지는 못했다.
“어때? 린을 위해서 일부러 부탁한 술인데.”
“맛있어. 이름이 뭐야?”
“그건 비밀, 궁금하면 오늘 밤- 시간 내주는 건 어때?”
잔을 흔드니 얼음이 맞물리면서 차가운 소리가 났다. 위하트잇은 그저 의뭉스런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다시 한 번 잔을 기울였고 아쉬운 얼굴의 상대방은 이내 흥미가 사라진 듯 본인의 잔을 기울였다.
다행스럽게도 포기한 모양인 듯, 싶어서 위하트잇은 안도의 숨을 조용히 삼켰다.
화려한 상류층을 위한 파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적당히 빠져 나갈 수 있지만, 기실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요, 조심해야하는 순간이었다. 파티란 것이 가지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 숨어있는 늙은 너구리, 혹은 구렁이들, 하이에나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위하트잇에게 있어서 그들은 매우 불편하고 거슬리는 천적이었다.
여러 메리트보다 더 높은 확률로 터지는 스캔이라거나 각종 찌라시들. 그것들을 가지고 신비주의 이미지에 흠집을 가하겠노라, 협박하는 이들 때문에 언제 어느 순간이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곳, 파티였다. 때문에 그녀는 참석할 때에도 남자 파트너 없이, 돌아갈 때도 남자 파트너 없이. 이미지 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있었지마는 언제 어디서 무슨 ‘오해’가 나서 불편한 일을 만들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역시 사전에 모든 일들을 차단하면서. 부디 어서 빨리 집에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 발을 옥죄는 신발을 벗어 던지고 갑갑한 드레스를 풀어 헤치고 오늘도 깔끔하게 넘어갔노라 그리 말하는 똑같은 하루가 될 것이다.
오늘도, 그런 ‘일상’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
오늘도 아름다워, 살아있는 음악의 여신 뮤즈!
톡톡 어깨를 두드리며 옆에 다가와 속살거리는 크리스에 위하트잇은 살풋 웃으며 가까워진 거리에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려 틈을 벌리면서. 가까이 붙은 크리스를 피해 자연스럽게 반대편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호화스런 내부가 그녀의 눈에 담겼다. 부러 앳된 모습에서 탈피하고자 한 때- 여신과 최초의 밀레시안,이름을 부르기조차 아쉽고 안타까운. 그 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던 세계에서 보았던 그 아릿한 사랑으로 애처로움을 자아내던 한 소녀의 눈으로 모습을 바꾼. 위하트잇, 그녀의 눈 위로, 휘황찬란한 모습에서 과거의 에린을, 아본을 그려내면서. 슬픔에 젖어 일그러졌을지 모를 숨을 애써 천천히 끊어 내쉬었다. 줄리엣, 애가 닳을 정도로 그 애처롭고 사랑스러웠던 아이의 이름을 애써 삼키면서.
오랜만의 추억에 그녀는 살며시 발을 담갔다. 곁의 크리스가 그녀를 추억의 늪에서 꺼내지 않았다면 필히 젖어 내렸을 그것들에.
“린아, 저길 봐. 그 녀석이 왔어!”
그 자였다.
어느 곳에서든 가장 화려한 사람이자 또한 가장 시선을 모으는 사람. 사랑받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앤서니 스타크. 평소라면 그저 ‘아, 오늘도 난봉꾼이 왔구나’ 혹은 ‘시끄러운 사람이 왔으니 슬슬 돌아가는 게 좋겠네.’ 정도라 생각하고 말았을 평범하지만,평범하지 않은 다난 중의 한 명. 솔직히 말해서 그녀와 별로 상관이 없는 자.
하지만 오늘은 그가 왔다는 말에, 그를 본 순간에 꺼림칙한 예감이 떠나지 않고 그녀를 집어 삼켰다. 그래, 나이를 먹었음에도 장난꾸러기같은 면이 있는 그 어린 아이의 눈과- 정확히 마주쳤을 때에. 그녀는 빌어먹을 예감이 따라붙은 것에 눈가를 좁혔다.
“흐-응? 린, 린. 보라고 저기.”
“보고 있어, 크리스.”
“린, 무슨 심경의 변화로 저 플레이보이께서 파트너를 매정히 거절할까.”
“글쎄. 딱히 알고 싶지는 않은데. 느낌이 좋지 않아서.”
곁을 지킨 모델의 팔을 놓는 손길이 제법 매정했다. 그것이 스타크만의 거절 방식이라는 것을 이 바닥에서 모르는 자가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유명한 손놀림.
욕심에 물든 눈동자가 추악한 분노와 질투로 물들었다. 그것이- 탄탄히 쌓아올린 신성의 끝자락에 난도질을 한다 할지라도 아주 미세한, 미세한 금이 생길까 의문이 서릴 ‘혼자’만의 싸움. 하지만, 그것이-하나, 둘 이상이 모이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 눈이 마주쳤다. 위하트잇은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빗겨 떨어뜨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오, 이게 누구신가! 스톤의 별이 아니신가! 거기에다가 그 옆에는 아름다운 피아니스트, 레이디 샤까지!”
“오늘도 화려하군 그래, Mr. 스타크!”
킬킬 거리며 다가와 화려하게 인사를 건네는 앤서니 스타크, 그리고 그런 그를 유난히 반기는 크리스.본의 아니게 사이에 껴서 차오르는 짜증을 애써 삼키면서. 위하트잇은 다른 의미로 쏟아지기 시작한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음을 인정했다.
평소의 시기와 질투, 그 어두운 감정과 달리 더 질척하고 끈적거리는, 불쾌하고도 혐오스런 감정이, 아까 전의 그 모델 혼자만이 아닌 다수의 시선이, 감정이 끈적하게 엉켜 그녀의 발치를 슬금슬금 기어오르고 있었다. 돈에 눈 먼, 혹은 아주 소수일지 모르는 사랑에 눈 먼 계집들의 질투라는 어두운 감정은 일반적인 질투의 감정보다 한 단계는 더 어둡고- 위협적이었다. 찬란히 빛나는 위하트잇의 신성의 끝자락을 갉아 낼 정도로- 무리가 되어 덤비는 그들의 매우 위협스런 감정이었다.
안정적으로, 다만 주기적으로 조금 폭발적인. 신성을 키우기 위해 적당하게 몸을 사리고 있던 위하트잇에게 있어서 그런 위험한 무리를 몰고 온 스타크가 반가울 리가 없었다. 부러 그 불쾌함을 알리기 위해 들고 있던 잔을 소리가 나게 탁, 바에 내려놓은 그녀는 무심한 눈길로 머리끝을 매만졌다.
“제가 낄 자리가 아닌 듯 싶으니, 자리를 비켜드리죠. 편히 대화 나누시길.”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적당히 치고 빠지는 법을 꾸준하게 지켰던 그녀로서는 사실상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라기보단 파티가 시작한지 고작 1시간도 되지 않은 시점이 늦었다고 할 수가 있을까 싶지마는. 그래도 얼굴 잠깐 비추고 돌아갔다면. 아니, 아예 이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오늘은 쉬었다면. 그랬다면 저, 앤서니 스타크와 엮이는 것 보다야는 훨씬 뒤탈이 없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그랬다면,이렇게 저 부정적인 감정으로 얼룩져 덤비는 것들에 대해서 이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치밀어 오르는 불쾌와 짜증에 아직 손에서 놓지 못한 잔이 파르르 떨렸다. 눈길이 닿았다. 곁에 다가온 이의 눈이었다. 낯선 사내의 눈, 불쾌한 일을 몰고 온 그 사내의.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얻었다는 양 즐거워 죽겠다는. 누군가의 존재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 같잖은 여신이란 직위를 가졌던 오만한 까마귀를 떠올리게 하는.
위하트잇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결코 좋은 첫인상이라고 할 수는 없을 사람이 불쾌한 기억만 내리 준 자와 닮은 짓거리를 한다는 건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오, 레이디. 당신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삐진 거야? 소문으로 듣던 것과 달리 귀여운 모습이 있네!”
“레이디는 그만둬요, Mr. 스타크.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제가 당신에게 그런 감정을 가져야 하나요. 오늘 처음으로 본 당신에게.”
그럴 가치가 있느냐, 조용히 웃으면서 속살거리듯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건네면. 보라, 저 눈. 저 즐거워 죽겠다, 흥미를 가진 눈을.
위하트잇은 차오르는 피곤함을 꾹꾹 누르면서 적당히 쏟아드는 시선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고민했다.어떤 식으로 말해야 과연 저 진드기 같은 남자가 떨어질까 피곤해졌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바른 교육 어쩌고 그래도 그 본성이란 것이 있다. 태생적으로 사람을 내려 보게 되는, 자기 뜻대로 될 것이라 자만하고야 마는 그 같잖은 성격이 있다는 뜻이었다. 불행스럽게도 눈앞의 사내 역시 그러했다.
“그럼 레이디보다는 귀여운 린아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나, Sweety?”
“당신이 그렇게 나를 부를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군요. 적당히 해주시길, Mr. 스타크.예의는 사람과 사람 간에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리입니다.”
물론 오만하게 사는 당신과 사람이 아닌 내겐 소용없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마는. 위하트잇은 필요가 없는 뒷말을 삼키며 어느새 자리를 비키고 없는 크리스를 찾아 눈을 굴렸다.
“하.”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고 하던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 없지만 익히 알고 있는 끈질기고 무례한 악질 기자 하나와 접촉중인 크리스의 모습에 위하트잇은 작게 이를 갈았다. 뻔했다. 고고하게 올라선 모습에 가지고 싶은데 꺾이질 않으니 인위적으로 조작을 해서라도 가지고 말겠다는 심리일 것이다.한 번도 스캔이 나지 않던 이가 매번 스캔들을 몰고 다니는 이와 엮인다면 그 뒤는 불 보듯 쉬운 이야기였다. 어떤 식으로든 평판이 깎여 나간 이후에 접근해서 가지고 놀겠다는, 그 추악한 남자의 본능이 어찌나 귀찮은지.
어쩌면, 차라리 순수한 흥미로 접근하는 이 짓궂은 장난꾸러기가 저 치보다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 위하트잇은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는 스타크를 경계했다. 기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사실상 스캔이라고 엮일 증거만 걸리지 않는다면 기사가 올라왔을 때 고소라도 할 수 있지. 심증 그 이상의 물증이 나타나면 곤란했다.
“적당히 귀찮게 굴어주시겠어요?”
“아, 스톤의 망나니 때문에 그래? 걱정 말라고. 원한다면 기사 정도야 조작해줄 수 있으니까.”
당당하게 속삭이는 말에 어이가 없어졌다. 애초에 그런 일이 생길 건덕지를 주지 않으면 될 일을 무엇하러 고생하나, 돈을 쓰나. 귀찮게. 조금 뾰족해진 그녀의 반응에도 능글거리는 웃음을 매달고 곁을 지키는 스타크에 서서히 남자들의 시선도, 여자들의 시선도 질척하고 음습한 기운을 띄기 시작했다.
위하트잇은 깊은 숨을 숨기지 않고 아낌없이 들어냈다. 이대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도저도 아닌 사태를 만들 것이 뻔했다. 어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어느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Mr. 스타크?”
“음?”
“전 지금 이 상황이 몹시 불쾌하거든요.”
사랑받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이런 어두운 감정을 받는 것은 피곤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힐긋, 던진 시선에 야살스런 눈웃음을 흘리면서 받아치는 것이 같잖다. 위하트잇은 차오르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다시 한 번 깊은 숨을 내쉬었다.
딱히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연락을 넣어둬야 할 듯 싶었다. 뒷세계와 연관이 있다는 걸 알리는 계기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분명 안정적인 것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강렬한 감정은 신성의 크기를 키우는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것은 어떤 불순물이 들어있을 지도 모르고 어떤 위험부담이 있을지 몰랐다. 눈앞의 복수가 급하긴 해도 그것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면 언제 어느 곳에서 허점을 찔려 역공격을 당할지 몰랐다. 모리안을 짓밟고 그 까마귀 날개를 꺾어 손에 신의 피를 적실 것을 원하는 입장으로선 혹여라도 까마귀가 저를 짓밟고 웃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죽어도 볼 수 없었다.
위하트잇의 눈이 일순 어둡게 일렁였다.
“흐응-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플레이보이를 두고 그런 눈을 하는 건 위험하다고?”
잡아먹힐지 몰라, Sweety!
귓가에 야릇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나갈 뻔한 손을 꽉 잡아 누르며 겹친 상태로 감추면서.위하트잇은 저의 곁에 달라붙어 어깨를 감싸 안는 무례한 손을 손끝으로 빠르고 날카롭게 때렸다. 벌과 같이 날렵한 반응에 얻어맞은 손등이 불그스름하게 올라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여전히 달라붙어 있는 스타크를 보며 애써 눌러뒀던 짜증을 더 이상 삭히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도 사람들의 감정에 예민한 그녀로서는 어느 정도 탄탄하게 쌓아올렸던 기반의 귀퉁이를 갉아드는 어두운 감정이 상당히 불쾌했다. 마치 모리안 같이.
“정도껏 하세요. 제가 스타크인더스트리에 고소장을 날리는 일이 없게요.”
남의 위에 서 있으려면 적어도 책임진다는 말의 뜻을 이해해야죠.
날카롭게 쏟아지는 말에 순간 멈칫하고 만 것은 이 말을 해줬던 이가 생각나서. 이상하게 오늘따라 유독 짙은, 애써 잊고 있던 에린의 물밀 듯 들어오는 향수에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 가냘픈 외형을 가진 밀레시안의 육체가 떨렸다.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절대적인, 감. 오랜 세월을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았던 밀레시안의 경험이 말하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비켜요.”
피곤했다. 갑작스럽게. 뭔가 좋지 않은 예감만이 아니라 몸 상태도 영 이상했다. 위하트잇은 갑자기 배에서 치고 오르는 격통에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짓이기며 터지는 신음을 참아 삼켰다. 수많은 전쟁터에서 구르면서 칼에 관통당하고 화살에 꿰뚫려 꼬치가 되는 일은 손이 부족할 정도로 많았다. 반면에 그 중에서 이렇게 통증을 심각하게 느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적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애초에 그 육신은 밀레시안의 육신이었으니.
그리고, 그 사실은 변함없을 텐데-?
“Sweety?”
조금, 버티기 힘들어졌다고 느꼈을 때에. 무언가가 부서져 내리는, 아니 표현할 길 없는 기이한 감각이 온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하필이면 오늘 따라 높은 굽을 신은 그녀는 점점 얼얼하게 달아오르는 복부에 결국 중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비틀, 몸을 기댔다. 뒤의 바에 팔꿈치를 괴어 간신히 섰지만, 벌벌 떨리는 다리는 얼마가지 않아 그녀가 주저앉을 것임을 쉬이 예상케 했다.
위하트잇은 고통이 새어나가지 않게 꾹 다물었던 입술을 열고 진득하게 달라붙은 핏빛의 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 번 격렬한 복통, 무너질 뻔한 그녀를 잡아 허리를 감싸 안고 저에게 기대게 하는 손길은 곁에 있었던 스타크였다.
“…미안하지만, 신세 좀 져야겠네요. 정말 죽어도 싫지만.”
어깨에 머리를 기대도록 자연스럽게 의도하는 손길에 작은 탄성이 기민한 위하트잇의 귀를 건드렸다.긍정, 혹은 부정의 감정이 섞여 있는 그 소리와 함께 아아, 꼼짝 없이 뜯어 먹을 거리를 원없이 제공하는 구나란 탄식이 고통에 절은 머릿속을 뒤 흔들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의 부탁이라면 특별히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어쩌면. 저 자신감에 넘친 모습이 같잖았던 것은. 한 때의 저 또한 저런 식으로 굴다가 결국에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모두 쏟아내고 빼앗기고 말아서.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혐오가 아니었을까. 사실은, 이렇게- 불안정한, 유쾌한 사람이었을 텐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면서. 고통 속에 엉거주춤 흐트러진 자세를 애써 바로하면서. 위하트잇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울리는 통증에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핥았다.
눈앞은 아찔하게 점멸(點滅)하고 있었다.
*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은 데구륵 굴러 주변을 훑었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나름 고풍스런 음악이 흐르는 소란스런 파티장이 아닌 고요한 실내. 숨소리조차 희미한 위하트잇, 그녀가 있기에 적막 그 자체란 이름 밖에 없는. 화려하게 펼쳐진 쇼윈도의 너머로 바다가- 흔들리고 있었다.,
“여긴.”
-Miss. 일어나셨습니까.
“―와우.”
아무도 없음이 분명한, 명백히 말해서 신의 반열에 어영부영 엉덩이를 들이 밀은 어긋난 존재기 때문에 사람이라고 칠 수 없는 위하트잇 밖에 없는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에 누군가는 소리를 치거나 화들짝 놀랄지 몰랐지만, 그저 자신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가 별로 되지 않음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그저 신기한 현상일 뿐이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무덤히 존재할 수 있는.
“누구니.”
-저는 자비스라고 합니다, Miss.
“헤에. 자비스라- 그렇구나. 그럼 자비스, 여긴 어디지?”
어제의 기억은 희미했다. 어찌저찌 파티장에서 벗어난 것 까진 기억이 났고. 그 이후에 근처에 미리 준비해둔 그녀의 숙소로 홀로 가려 했다가 앤서니 스타크의 손에 잡혀 끌려가듯 카메라 셔터 속을 지나간 것도 기억났다. 다만, 그 이후의 기억은 안락함 속에 젖어 조금 희미해져서.
위하트잇은 풀어 헤쳐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렸다. 폭신한 러그가 그녀의 우윳빛깔의 고운 발을 감쌌다.
“여기는 바로 이 토니 스타크의 말리부 저택이지! 온 걸 환영한다고, Sweety!”
“아. 자비스가 알려줬나요, Mr. 스타크?”
“오, 딱딱하게 그러지 말라고. 예쁜 얼굴이 차가워 보이잖아!”
이불을 걷어내면서 슬쩍 내려다 본 모습은 어린 소녀들의 꿈결 같은 드레스가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축축한 것이 다리 사이를 타고 흐르는 불쾌감까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부러 등을 보이고 있던 스타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나가요. 단호하게 설핏 웃음을 머금고 그리 말한 그녀는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사슴같은 눈망울을 꿈뻑거리는 그를 보며 아예 입꼬리를 끌어 올려 환히 웃었다.
“나가라고 했을 때 나가줄래요.”
몸을 돌리면서 짚었던 자리가 축축한 것이 피부를 타고 흘렀다. 코끝을 찡그리게 만드는 역하면서 비릿한 내음까지. 그저, 그저 지금 이 순간. 위하트잇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그저 망연히 직감할 뿐이었다.
“아니 나는,”
-Sir, 전화가 왔습니다.
“오, 갓. 자비스! 누구 전화지?”
-Miss 페퍼입니다.
“바쁜가보네요, 어서 가시는 게 좋겠어요.”
비릿하고 축축한. 머릿속으로 자꾸 이게 무슨 상황인지 머리를 굴려보아도- 명확한 상황이 떠오르지 않았다. 위하트잇은 그저 초조한 마음에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손에 이불보를 엉망진창으로 긁어 내렸다. 초조하게, 타들어가는 속은 자꾸만 갈증을 불러왔다. 바삭하게 마르는 입술, 머릿속에 시끄럽게 울리는 경종까지. 불안한 그녀의 심정을 알리듯 일렁이던 신성이 일순 찬란하게 빛났다가 가라앉았다.
“―아!”
꺾일 듯, 꺾이지 않던. 차분하게, 일정하고 안정적이게 차오르던 그녀의 신성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어제 하루가 위태롭긴 했어도 제법 큰 상태의 신성이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늘 들리던 아이들의 소리는 여전히 들렸지만, 그 소리와 함께 반딧불처럼 모이던- 신성들이 보이지가 않았다.누군가가 목을 잡아 짓누른, 그런 느낌이 온몸을 눅진하게 적셨다.
“뭐야, 어디 아픈 거야? Sweety?”
일반적인 다난의 눈에 보일 리가 없는 일이었기에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 하얗게 질린 위하트잇의 모습에 나가려던 스타크의 발이 잡혔다. 그가 다가와 어깨를 잡아 챈 순간 무너지듯 그 품에 안기면서. 그녀는 몸을 벌벌 떨었다.
끝없는 불안감은 순식간에 공포와 두려움이 되어 그녀를 집어 삼켰다. 모리안을 잘라내기 위해서 쌓아올렸던 모든 기반이 무너져 내렸을 때의 그 상실감과 허무함, 갈 곳 이른 분노보다도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일이 더 크게 그녀에게 와 닿았다. 생전 처음 겪는 고통, 느낌, 불쾌감. 그리고 차오르는 이유모를 불안감과 무서움, 익숙하고도 사랑하는 존재들의 명백한 공백. 모든 감정들이 휘몰아쳐 그녀를 짓누르고 적시고 들어왔다.
“Sweety? Sweety?!”
그때. 무엇인가. 닿았다. 에린으로부터, 그녀에게. 닿았다.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었기에 닿은 그것에.깜짝 놀라 눈을 크게 홉뜬 위하트잇은 이내- 천천히 몸을 늘어뜨리며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지 않았다.
이것이, 신들이 밀레시안을 불렀을 때의 그 감각인 걸 그녀는 알고 있었기에.
*
어둡되 스스로 빛나고 있음으로 공간을 찬란히 빛내던 모리안과 달리 이번에 위하트잇, 그녀를 부른 공간은 끝없는 어둠에 파묻혀 있었다. 아늑하되, 그녀를 배척하는 느낌이 맴도는.
「위하트잇.」
익숙한 소리였다. 한 때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었던 목소리였고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조차도 익숙한 것이었다. 이렇게 미끄러져 목을 졸랐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모리안의 수족으로서 다난을 위해 포워르를 죽이던 그녀에게 있어서 그 원한은, 증오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모리안이 다난을 사랑했듯, 이 손의 주인은 몸이 바스라질지언정 자신이 만들어낸 종족, 포워르를 사랑했으니까.
-…키홀.
신이었다. 포워르의 신, 모리안과 대비되는 순백의 날개를 지닌 칠흑의 신. 뺨 언저리를 헤매는 손이 미끄러져 내려와 목을 조이지 않은 것에 무심코, 혼란스러운 감정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사이 손에 쥐고 만 안도감에 미쳐서.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뺨에 얼굴을 부비면서 위하트잇은 속내 깊이 붙어 있던 숨을 긁어내어 뱉었다.
찰나의 순간, 눈앞이 흐릿하게 일렁이더니 뜨거운 것이 흘러 내려- 떨어졌다. 천천히 모여 고였다.
「…왜 울고 있는 건가. 밀레시안으로서 당당했던 그 모습이 아니군. 언제나 할 말, 못할 말 구분 못하고 덤비던 너는 어디 갔나.」
눈을 감고 그저 뚝뚝, 눈물만을 흘리고 있던 위하트잇은 푸훗, 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감은 눈을 떴다.눈물이 매달려 유리구슬 마냥 반짝이는 눈은 저의 앞에 온전히 서있는, 저를 내려 보는 키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딘가 당황스러워 보인다고 하면, 그것은 저의 착각일까. 그녀는 작게 키득이며 아예 두 손을 올려 키홀의 손을 붙잡고 뺨에 꾸욱 눌렀다.
-나는 이제 에린에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저주스런 밀레시안이란 사실은 변함없을지언정,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칼을 겨누지 않아도 괜찮으니까요. 더 이상 모리안의 귀머거리 수족으로서 당신에게 그 어떤 죄도 짓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이건, 그냥, 그냥. 그냥- 눈물인거에요. 그래요. 그냥, 그런거에요.
그리운, 추억의 향기가. 맴돌았다. 뿌옇게 흐려졌던 눈앞이 다시 맑아지다가도 톡, 톡.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결코 아니라고 말해도 그녀 또한 에린에게 매료되었던 자였기 때문에. 추억을 머금은 그 에린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없기에. 그녀는 그저 오랜 설움을, 그리움을, 삭히고, 얼어붙은 그 눈물을 조금씩 녹여 낼 뿐이었다.
「위하트잇.」
듣고 있어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미약한 온기 어린 손에 뺨을 부비고 있으면서. 몰려드는 향수의 파도 속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입술은 힘없이 달싹였다.
「지금의 그대는 밀레시안이 아니다.」
크게 홉떠 치켜 오른 눈동자에 매달린 눈물이 볼품없이 뚝. 떨어졌다. 청천벼락과도 같은 그 단호한 말에 그녀는 혼란스러움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더 정확히는 밀레시안의 육체가 서서히 다난의 그 육체와 똑같이 바뀌고 있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 뺨에 얹고 있던 손이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난 위하트잇은 경악어린 눈으로 눈앞의 신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혐오해 마지않는 신이 아닌, 어쩌면 경애할지도 모르는 한 때의 적을.
「모리안의 가호가 거두어지고 육신이 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지.」
힘없이, 끄덕인 고개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몸을 대변하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끝이 스스로의 몸을 와락 껴안으면서 기어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야 만 그녀는. 절망과 환희가 뒤섞인 엉망진창의 현재를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엔 천천히 변했을 것이다. 그때의 너는 밀레시안이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밀레시안의 꺼풀을 벗고 신의 힘을 탐하려 한 순간에. 너의 밀레시안이란 틀이 깨진 것이다.」
-그게, 그게 지금 내가 다난이 되어간다는 것과 무슨 상관이죠.
여린 살결을 긁어내리는 손에 피가 묻어났다. 혈흔, 그것은 살아 숨 쉬는 다난 뿐만 아니라 밀레시안 또한 동등하게 얻었던. 그럼에도 살아있되 살아있지 못한 몸으로 살아야 했던. 혼란스러움은 하나의 폭탄이 되어 펑펑 터지기 시작했다.
혼란에 젖어 허우적거리는 위하트잇의 모습에 키홀, 그는 깊은 한숨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네가 있는 곳은 에린이 아니다. 또한 너를 가두기 위한 아본도 아니지. 지구라는 세계, 차원. 그 자체다. 너는 거기서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어. 섣부른 행동이 지금의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하?
「밀레시안이란 종족이 허용되는 세계는 에린뿐이다. 유일한 곳이지. 그런 종족의 근본이나 다름없는 에린에서 멀어진 너는 불안전한 존재로 격하되어 있는 상태다. 모리안의 가호가 사라진 밀레시안의 육체는 지속적으로 주어지던 신의 힘이 사라졌기 때문에 세월의 흐름을 빗겨가지 못하고 낡아가는 중이지. 그나마도 네가 거기서 나름대로 육신을 수복시키는 일을 시도했기 때문에 밀레시안으로 남아있는 영혼의 특성과 함께 육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까딱 잘못하다간 존재가 소멸될 수도 있었어. 그렇게 가까스로 유지되던 밀레시안의 육신은 지금 급격하게 신성을 띄기 시작한 너의 영혼으로 인해 밀레시안의 특성이 변질되고, 다난의 것으로 바뀌고 있다. 그로 인해서 너의 영혼과 육신의 연결고리가 약해진 것이다.」
단호하게, 잘라낸. 그 말에. 다난화가 지속된다는 그 말에. 밀레시안의 육신이기에 신성이 모이기에 부족함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행했던 모든 것들이. 전부 순식간에 백지로 돌아가는 그 선언에. 여태껏 그녀의 귀를 간질이던 신도들의 그 환희에 찬 감정들이 더 이상 닿지 않음에. 희미하게 들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마저 꺼질 듯 위태로운 것에. 그네들의 조잘거림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그 찬란한 빛은,긍정적인 감정으로 쌓아 올렸던 그 아름답고 고귀한, 고결한 그 힘의 근원들이.
전부 그녀의 손에서 훨훨 날아- 멀리 떠나버렸다.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 곳으로.
-아, 아아, 나,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떨리는 두 손이 얼굴을 가리고 처절한 울음이 그 사이로 터져 나왔다. 길게 우는 탄식은 그녀의 부서진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오롯한 복수 하나를 위해서 행했던 그 모든 노력이, 단 하나만을 꿈꾸며 이를 갈고 기를 써가며 쌓아갔던 모든 것들이 부서져 내렸다. 찬란히 빛내던 그 신성들이 한줌의 모래가 되어 흩어져 감에 쌓인 한이 연쇄적으로 터져 쏟아져 내렸다.
「…위하트잇.」
-키홀! 나는, 어떻게, 내가 어떤 심정으로! 어떻게 버텨왔는데에!!!
모리안의 복수는 훌륭했다. 밀레시안 위하트잇을 무너뜨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날카롭게 세운 이까지 뽑아 던져 버렸다. 감히 여신에게, 여신이 사랑하는 다난들에게 손을 휘두른 죄로 그녀는 그리 묶이고 버려져 떨어졌다.
「아직, 내 말은 전부 끝난 것이 아니다 위하트잇.」
-왜요! 다시 날 밀레시안으로 만들어 줄 건가요? 내가 다시 당신들과 똑같이 신성을 가지고 신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게 해줄거냐구요? 모리안에게! 그 끔찍한 까마귀에게! 단죄의 칼을 겨누려는 날! 지지해줄 거냐구요….
크게 홉 떠 노려보는 그 눈은. 뚝, 뚝 떨어뜨리는 그 붉은 기 어린 눈물은. 그녀의 손 위에 고여서. 새파란 독기를 품고 순백의 신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한 때, 그녀의 적이었던. 그녀가 죽이려 했던. 그녀가 검을 겨누고 거침없이 적을 베어나가며 하늘에서 떨어뜨리려 했던. 한 어리석고 오만한 여신을 위해 목숨조차, 영혼조차 포기한 어리석은 밀레시안마저 굽어 살피려 했던. 그 순백의 신, 고아한 모습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원망을 토하고 삼키지 못한 분노에 몸을 떠는 그녀를 굽어 살피는. 오롯한 신으로서 각성한, 포워르의 신. 그의 입이 차분히 열렸다.
「위하트잇, 그대는 이미 에린을 떠난 자다. 무엇하러 이곳에 돌아오려 하는가. 이미 그대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없는 이곳에. 홀로 남았던 그 세월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외면하는 것인가. 처절하게 무너졌던 그대가 어찌 이곳에 홀로 돌아오겠다고 하는 것인가. 홀로 남은 밀레시안으로서 갖은 모욕을 당하고 온갖 수모를 겪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이곳에 돌아오겠다고. 이미 그대와 같은 시대를 살아갔던 밀레시안들은 전부 추방당한 이후인 것을. 돌아와도 갈 곳 없는 그대가 어찌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덤덤히 문제를 짚어 나가는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대도, 실망도 그 무엇도. 그 어떤 감정 하나 없이. 그저 직설적으로 사실을 고할 뿐인.
「스스로 미쳐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맹세할 수 있는가. 그대가 그리도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는가.」
고요한 침묵이 그녀를 차갑게 휩쓸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인가, 어디서부터 틀렸던 것인가. 괴로웠던 기억도 있지만 그만큼 사랑하고 행복했던 기억도 함께 공존한다. 빛과 그림자처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그 상관관계에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 줄수도, 그럴수도 없는 것이 현실.
위하트잇은 처연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무엇이, 무엇이 그리도 잘못한건가요. 내가 무엇을 그리도 잘못했기에 이리 나를 괴롭히는 건가요. 이미 떠난 존재라 하면서도 기어코 손을 놓지 못했던 것도 여신, 나를 이리 망가트린 것도 여신. 파멸로 이끌지언정 그녀의 그 지독한 술수에 놀아나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한 것이 그리도 죄였나요.
신의 힘을 가졌기에 그것에 순응하고 신이 되고자 했던 것이 그리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나. 위하트잇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떨리는 손을 말아 주먹 쥐었다.
-그래, 내가 신이 되고자 했어. 그 오만하고 가증스런 여신의 날개를 꺾어 짓밟고 싶어서! 나를 이렇게 몰아세우는! 날 괴롭히는! 그 손이, 그녀가 숨이 막혀서! 내가. 내가 신이 되려 했어. 그거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왔는데, 나 홀로 1000여년의 세월 동안 버티면서 그랬는데. 그랬는데….
그녀의 처절한 심정의 고해가 끝나고. 침묵하고 있던 키홀이 그녀에게 다가가 친히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려 마주한 그녀의 눈은 텅 빈 공허의 바다였다. 사막의 죽어가는 나무와 같았다.
「위하트잇, 그대는 다난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밀레시안이다. 육신은 그저 단 하나의 꺼풀, 그 안에 자리한 영혼의 가치는 빛바래지 않는 법. 기억해라, 이것은- 그대의 시련이니. 그대가 그리도 처절하게 부르짖는 복수를 위한 길에 드러난 작은 돌멩이 하나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라.」
죽어가던 눈동자에 생기가 스미고 빛이 어렸다. 점점 어둠에 물든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에 위하트잇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꿈에서 깨어남을 알리듯 붕괴하는 세계, 그리고 그 곳에서 고고히 서있는 순백의 신.
그녀가 웃었다.
*
아튼 시미니여, 당신은 참으로 다정하면서도 잔혹한 신이니라.